문학/아동문학

닥나무 숲 초대장-시와 동화 2007 봄호

한우리독서토론논술 2008. 2. 14. 08:48

닥나무 숲 초대장        

                                 

                                             박월선         


  붉으스름한 해님이 산마루에 걸터 앉아있습니다.

  할머니는 여전히 등만 보인 채 닥종이 인형을 만들고 있습니다. 마루에서 뒹굴뒹굴 하던 한수는 멍하니 하늘을 봅니다.

  ‘아, 심심 해!’

  중얼거리던 한수는, 슬그머니 할머니 앞쪽을 들여다봅니다.

  할머니 연구실에는 여러 모양의, 닥종이 인형들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다양한 표정과 포즈를 짓고 있는 인형들은 마치 살아있는 듯 생동감이 넘칩니다.

  할머니는 이곳 한지마을에서 닥종이 인형을 만들고 제자들을 길러냅니다. 

  가까이서 보니, 할머니의 손놀림이 놀랄 만큼 빠르고 섬세합니다. 철사로 인형 뼈대를 세우고, 그 위에 종이죽으로 머리와 몸통을 만들어 붙입니다. 얇은 한지를 찢어 한겹 한겹 오려붙이는 몸통은 특히 정성을 더합니다. 마치 생명을 불어 넣는 것 같습니다.

  드디어 오동통하게 살이 오른 인형이 다홍치마에 연두저고리를 입고 새롭게 태어납니다. 인형을 지그시 바라보는 할머니의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가 흐릅니다. 할머니가 유일하게 웃는 모습입니다.

  ‘치, 할머니는 닥종이 인형만 좋아해!’

  괜히 심술이 나서 한수는 투덜거립니다.

  그때입니다.

  “돈도 안 되는 그까짓 인형! 잔뜩 만들어서 도대체 어쩌겠다는 거예요?”

  언제 왔는지 술 냄새를 풍기며 아빠가 거칠게 말합니다. 분명 오늘도 사업 자금을 위해 한지 공장을 팔자고 떼쓰러 왔나 봅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묵묵히 닥종이 인형만 만듭니다.

  아빠의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화가 나는지 아빠의 숨소리가 거칠어집니다. 한수는 아빠와 할머니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봅니다. 씩씩거리는 아빠와 인형만 만드는 할머니, 두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있는 것 같습니다. 두꺼운 유리벽. 

  ‘치, 할머니가 아빠의 소원 좀 들어주면 안 되나?’

  하지만 주름이 가득한 할머니 얼굴은 입술을 꼭 다문 채 굳어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할머니는 아빠가 한지공장을 맡아서 운영하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아빠는 도시로 나가 사업을 벌였고 부도가 났 습니다. 한수네 집은 가구마다 빨간 스티커가 붙었습니다. 엄마는 집안의 물건들이 법원에 압류된 거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엄마는 일을 찾아야 했고 한수는 할머니 집에 얹혀살게 되었습니다.

  아빠는 다시 사업을 벌이기 위해 자꾸만 할머니를 조릅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조상대대로 이어 온 가업을 버릴 수 없다고 강경 하십니다. 이것이 할머니와 아버지의 두꺼운 벽입니다.

  아빠는 한지 공장을 볼 때마다 비웃습니다.

  “흥, 돈도 안 되는 저 애물단지를 나보고 이어 받으라고? 내 청춘을 이런    곳에 바치라고? 천만의 말씀! 난 그렇게는 못해요, 아버지가 시간낭비, 돈    낭비했으면 됐지. 이 아들까지 그래야 되겠어요?”

  아빠는 할머니 연구실을 향해 밤새 소리치더니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 밤도 할머니 연구실은 불이 꺼지지 않을 것 입니다. 아빠가 큰소리를 치고 간 날이면 할머니는 더 열심히 연구실에서 밤을 지새웁니다.

  무뚝뚝한 할머니와 함께 지낼 시간들이 너무 길게 느껴집니다.

  ‘빨리 아빠가 예전처럼 당당하게 일을 했으면…….’

  한수는 힘없이 중얼거립니다.

  그때 작업장에서 일하는 용삼이 할아버지가 뒤뜰 한지 작업실로 들어갑니다. 할아버지는 아주 오래 전부터 공장에서 일했다고 합니다. 가끔 할아버지는 쉴 짬이 생기면 한수에게 옛날이야기를 해 줍니다. 주로 한지 공장 이야기였지만 심심한 한수에게는 그것마저도 재미있습니다.

  “할아버지!”

  한수는 할아버지를 부르며 얼른 뒷마당 문을 열었습니다.

  “뒤뜰 작업실은 위험 하니 들어가면 안 된다.”

  갑자기 할머니가 했던 말씀이 생각나 잠시 멈칫합니다. 그러나 살짝 뒷마당 문을 밀어보니 아기자기한 풍경이 보입니다.

  할아버지는 없고 자그마한 돌들로 쌓여진 동그란 연못이 보입니다. 돌 틈 사이에 빨강, 노랑, 진분홍의 여러 가지 꽃들이 옹기종기 피어있습니다. 가까이 가 자세히 살펴보니, 연못 가장자리에 네모난 받침이 있고 그 위에 한지를 한올 한올 꼬아서 만든 제법 커다란 꽃신이 있습니다. 신으면 한수의 발에 꼭 맞을 듯합니다. 슬그머니 발을 넣어봅니다. 딱 맞습니다. 이번엔 발끝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한걸음 한걸음 걸어봅니다.    

  갑자기 구석진 곳에서 누군가 걸어 나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누굴까? 할머니는 분명 연구실에 있을 텐데.’

  어, 방금 전에 연구실에서 태어난 다홍치마의 인형입니다.

  “너를 기다리고 있었단다.”

  닥종이 인형이 덥적덥적 말합니다. 

  한수는 깜짝 놀랐습니다.     

  “너랑 함께 갈 곳이 있어.” 

  한수는 주춤 한발자국 뒷걸음을 칩니다. 다시 닥종이 인형이 다가옵니다. 한수의 눈동자 안에 인형의 얼굴이 가득 들어옵니다. 놀랍게도 인형의 눈동자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금방 떨어질 듯 합니다. 가여운 생각이 듭니다.

  ‘순전히 눈물 때문이야. 너를 따라가는 것은.’  

  인형이 손을 내밉니다. 한수는 그 손을 잡습니다.

  인형이 빨리 걷기 시작합니다. 닥나무가 끝없이 계속되는 언덕배기 밭이 나타납니다. 마치 푸른 비단이 깔린 듯 아름답습니다. 언덕 뒤로 높은 산이 보이고 그 옆으로 작은 오솔길이 나 있습니다. 닥나무의 연초록 잎사귀 사이로 햇살이 강하게 내리 비치고 있습니다. 

  할머니 집 뒤에 펼쳐진 닥나무 숲인 것 같습니다. 

  “와! 멋있다.”

  “이 닥나무들이 우리를 태어나게 해.”

  “그래? 가까이 있어도 관심을 두지 않아 몰랐어.”

  할머니 집 뒤꼍 언덕배기에 끝없이 펼쳐진 닥나무 숲을 보고도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초록의 기분 좋은 바람이 얼굴에 부딪힙니다. 바람은 인형과 한수를 살짝 밀어 닥나무 숲 사이에 있는 또 다른 작업실로 안내합니다. 그 앞에 서자 문이 저절로 스르륵 열리며 둘을 흡수하듯 끌어당깁니다.  반투명 창호지가 햇빛을 적당히 통과시켜 발끝에 부드럽고 은은한 빛을 만들고 있습니다. 한쪽으로 빛이 모이는 곳이 있습니다. 인형은 한수를 데리고 그 빛 속으로 들어갑니다.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었습니다.

  “한지 공장으로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갑자기 어디선가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주위를 살피며 한 발 한 발 다가가자 점점 뜨거운 기운이 느껴집니다.

  가마솥 속에서 잿물과 함께 닥나무가 펄펄 끓고 있습니다. 용삼이 할아버지가 장작불을 지핍니다. 닥종이인형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습니다.

  “용삼이 할아버지!”

  반가워서 한수는 할아버지 가까이 다가갑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한수가 보이지 않는 듯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할아버지는 삶아진 닥나무들의 겉껍질을 벗겨내고 속껍질만 절구통으로 옮깁니다. 콩콩 찧어 죽으로 변한 닥나무들은 다시 지통으로 옮겨집니다. 할아버지는 섬유질이 잘 풀어지도록 대나무로 휘젓습니다. 

  “뜨거워도 참아야 해!”

  어느새 다시 나타난 인형이 속삭입니다. 그러더니, 긴 한숨을 쉽니다.

  “왜? 무슨 고민이 있는 거야?”

  고개를 갸웃하며 한수가 묻습니다.

  “나는 네 아빠가 미워. 자꾸만 한지공장을 팔라고 하시잖아? 그럼 우리들    은 어디로 가라고……, 우리들은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이제 이 세상에서    우리 인형들은 모두 사라지고 말 거야.”

  “그렇구나, 난 그런 줄 전혀 몰랐어.”

  인형을 꼬옥 껴안고 위로합니다. 한수의 가슴이 따듯해집니다.

  “네 할머니도 우리가 없으면 외로울 거야.”

  “흥, 우리 할머니 외롭다고?”

  “그럼, 할아버지가 계실 적에는 말동무가 있었지만 이제는 인형들 밖에     없어. 인형을 만들면서도 얼마나 아빠 걱정을 하시는지 우리가 더 속상해.    저렇게 날 새워가며 인형을 만드시는 할머니 건강도 걱정되고.”

  “할머니가 아빠 걱정을 하신다고? 관심도 없는 줄 알았는데.”

  고개를 흔드는 인형의 두 눈에 이슬이 맺힙니다. 그러더니 한수의 손에 사진을 쥐어줍니다. 할머니가 어린 아빠를 꼬옥 안고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사진입니다. 

  인형은 거친 숨을 몰아쉽니다.

  “네 아빠에게 전해 줘. 그리고 할머니는 네 아빠를 엄청 사랑 하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인형의 몸이 갑자기 굳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인형의 몸은 딱딱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한수는 놀라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섭니다. 그러자 인형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한수는 더듬더듬 앞으로 걸어갑니다. 물컹물컹한 젤리 속을 헤치고 가듯 답답합니다.

  “쿵”

  뭔가에 부딪혀 주저앉았습니다. 안개가 걷히듯 주변이 서서히 보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닥종이인형은 없습니다. 대신 한지로 만든 여러 가지 물건들이 가득 있습니다.

  지승요강, 갑게 수리 약장 등 마치 역사책에서나 보았던 옛 조상들이 사용했던 물건들이 곳곳에 먼지가 듬뿍 쌓인 채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구석에는 전시관으로 옮겨갈 닥종이들이 모여 있습니다. 언젠가 용삼이 할아버지와 함께 본적이 있는 창고입니다. 이 창고 속 재료는 모두 닥나무입니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닥나무 앞으로 다가갔을 때입니다.

  “으-”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빠!”

  할머니 집을 떠난 줄 알았던 아빠가 술에 취해 누워있습니다.

  “안돼! 나를 그냥 둬요!”

  악몽을 꾸었나 봅니다.

  “아빠.”

  한수는 아빠를 흔들어 깨웁니다.

  “어, 내가 여기서 잠이 들었네! 네 할아버지 꿈을 꾸었어. 그러고 보니, 낼    모레 식목일이 할아버님 제사구나…….”

  말을 잇지 못하는 아빠가 딱합니다. 한수는 아빠의 손에 사진을 쥐어줍니다. 아빠가 사진을 봅니다.

  “그래. 나에게도 이런 시간이 있었지. 받은 사랑에 대한 기억은 잊고 더     받지 못한다고 불평만 하고 살았나 보구나. 네 할아버지가 고생하시는 할    머니를 데려갈 날이 얼마 안 남았다고 말하더라.”

  아빠의 눈에 이슬이 맺혀있습니다. 

  한수는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며 소리칩니다. 

  “아빠, 이번 식목일에 앞쪽 공터에도 닥나무를 심어요!”

  “응? 닥나무? 그래! 그러자.”

  아빠는 고개를 끄덕입니다. 한수는 조심히 아빠의 얼굴을 들어다봅니다. 누렇게 든 얼굴에 움푹 꺼져 들어간 두 눈자위, 그리고 꾸겨진 옷을 입은 뒷모습이 외롭고 쓸쓸해 보입니다.

  “아빠, 나는 여기서 우리 가족 모두 모여서 살고 싶어. 아빠랑 헤어져 사    는 거 싫어.”

  아빠는 할머니 작업실 쪽을 봅니다. 한수는 아빠의 손을 잡고 창고에서 나와 뒤뜰로 갑니다.

  한수가 신었던 꽃신이 연못가에 아까처럼 단정히 놓여 있습니다. 쳐다보는 한수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스칩니다.

  한수는 빠른 걸음으로 할머니께 갑니다. 연구실 문을 살그머니 열어 봅니다. 할머니는 인형 전시회 초대장을 봉투에 담고 있습니다.

  “할머니, 저도 주세요. 제가 우리 반 친구들 많이많이 초대할 게요!”

  “정말이냐?”

  “그럼요, 이 똑똑한 손자가 빈 말 하는 것 보셨어요?”

  할머니 얼굴이 환해집니다. 할머니의 까칠한 손이 한수의 얼굴을 쓸어내립니다. 아빠는 말없이 고개만 숙이고 서 있습니다.

  어느새 땅거미가 지고 있습니다.

  산마루에 걸터앉아 있던 하늘빛이 분홍으로, 어스름한 보랏빛으로 변하더니 길게 드리운 구름 속으로 점점 가라앉습니다.

  어디선가 닥종이 인형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한수야, 고마워!” 




<시와 동화> 2007년 봄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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