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신춘문예> 올가의 편지 |
동화 당선작 - 송마리 |
엄마는 하와르를 찾으러 떠났어요. 보름 전 아침이었어요. 먹이를 주러 갔더니 하와르가 보이지 않았어요. 엄마는 두 말도 하지 않고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말 위에 올라탔어요. 하와르가 아직 멀리 못 갔을 거라고, 호쇼르(만두)를 건네는 나에게 엄마는 말했어요. 엄마는 전사처럼 말 엉덩이를 두 발로 차며 초원을 달려갔어요. 맞아요. 엄마는 다섯 살 때부터 말을 타고 초원을 달렸으니까요. 몽골 말타기대회에서 남자들을 제치고 우승도 했으니까요. 아빠, 생각나세요? 내가 다섯 살 때 아빠는 나를 하와르의 등에 태우며 말했잖아요. 엄마처럼 씩씩한 여전사가 되라고요. 나는 그때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요. 갑자기 아빠 키보다도 높이 올라왔거든요. 하와르가 한발 한발 초원을 내딛었을 때 나는 하와르의 등에 납작 엎드린 채 고삐를 꽉 움켜쥐고 있었어요. “올가야 일어나 앉아. 천천히.” 뒤에서 엄마가 소리쳤어요. 나는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세웠는데 하와르가 천천히 달리는가 싶더니 속도를 냈어요. 나는 겁이 나서 엄마 아빠를 불렀지만 아빠와 엄마의 웃음소리만 들렸어요. 하와르는 물웅덩이까지 달려갔어요. 그곳에서 물을 조금 마신 뒤 다시 나를 태우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아빠가 하와르의 등에서 나를 안아 내렸었죠. 온 몸에 힘이 빠지고 엉덩이도 아팠지만 이상하게 다시 하와르를 타고 달리고 싶어졌어요. 그 뒤로 나는 매일 하와르의 등에 올라타고 초원을 달렸어요. 아빠, 하와르는 어디쯤 있는 것일까요? 어쩌면 지난 겨울 우리가 머물던 곳을 지나갔을지도 몰라요. 내가 하와르에게 쓸데없는 말을 해서였을까요? 아빠의 편지를 받은 날은 아빠가 계신 곳, 한국을 지도에서 찾아보았어요. 그런 날은 잠이 오지 않았어요. 그래서 하와르에게 가서 말하곤 했어요. 아빠를 만나러 가자고요. 지도를 보면 하와르를 타고 남쪽으로 한 열흘만 가면 될 것 같았어요. 물론 하와르는 아무 대답이 없었어요. 나도 그냥 해본 말이라는 거 알아요. 하지만 하와르가 사라지기 전날 다시 하와르를 졸랐어요. 호쇼르와 양젖을 담아서 내일 길을 떠나자고요. 아빠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안산 어딘가에 계신다고 했죠. 아빠의 편지와 사진을 보는 순간 당장 아빠에게 달려가고 싶었어요. 가구공장에서 나무를 자르고 있는 아빠의 얼굴이 뿌연 먼지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어요. 먼지를 뒤집어쓴 아빠의 머리가 하얘서 처음에 깜짝 놀랐어요. 아빠가 어느새 늙어버린 건 아닐까 하고 말이에요. 그래도 아빠는 카메라를 보고 웃고 계셨어요. 아빠는 그곳에서 무얼 만드세요? 옷과 이불을 넣어두는 장롱이라는 가구를 만든다는데 잘 이해가 가지 않아요. 그런 것이 왜 필요한가요. 우리 식구들의 옷은 다 합쳐서 스무 벌도 안 되는데. 옷과 이불을 넣기 위해서 그렇게 큰 가구를 만들다니. 그런 장롱이 있다면 우리 게르는 꽉 차서 움직이기도 힘들 거예요. 하긴 한국 사람들은 옷도 많고 이불도 많으니까 그런 게 필요하겠지요. 엄마도 떠나기 전에 울란바토르를 다녀왔어요. 내게 입학선물로 예쁜 옷을 사가지고 오셨어요. 내 머리맡에 걸어둔 그 옷을 볼 때마다 엄마가 더 걱정돼요. 아빠, 엄마는 하와르를 만났을까요? 아빠, 한국이라는 그 먼 곳에서도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고 계시죠. 아빠가 한 달 전에 보내준 학용품은 이미 가방에 다 싸놓았어요. 가끔 동생이 내 가방에서 몰래 크레용과 연습장을 꺼내 아빠얼굴을 그리곤 해요. 나는 그냥 모른 척해요. 아침 일찍 할머니가 양젖을 짜오라고 해서 양동이를 들고 나왔어요. 동생이 따라 나오면서 오늘은 엄마가 올 거라고 말했어요. 나도 밤새 불은 양젖을 짜면서 고개를 끄덕였어요. 동생이 입까지 흘러내린 코를 쓰-윽 닦으며 웃었어요. 동생은 아빠가 떠난 다음부터 자기가 남자라고 뭐든지 하려고 해요. 여전히 코를 흘리면서 말이에요. 할머니가 따뜻하게 데운 물을 내 앞에 놓으며 오늘은 좋은 날이니까 세수를 깨끗이 하라고 했어요. 그래요. 오늘은 기다리던 학교를 가는 날이니까요. 아빠는 두 해나 학교를 못가고 있던 나를 걱정하셨죠. 그래서 한국으로 떠나셨다는 것도 알아요. 아빠가 떠나시던 날 하와르의 등을 쓰다듬으면서 내게 하와르를 부탁하셨잖아요. 나는 아빠에게 한국에 꼭 가야 하냐고 물었던 것 같아요. 아빠는 대답 대신에 초원을 하얗게 덮은 눈을 바라보며 말했고요. 아빠가 떠난 뒤 우리 식구는 봄에 해야 할 이사걱정을 하고 있었어요. 나에게 엄마와 할머니를 도와 살림살이를 챙기라고도 말하셨지요. 아빠는 잘 모르실 거예요. 사실 나는 이사하는 것을 좋아하거든요. 이사할 때가 왔다는 것은 봄이 온다는 거잖아요. 우리 집 이사는 삼촌와 삼촌 친구 두 사람이 가죽을 걷어내고 땅에 박힌 나무 기둥을 뽑아내면 하루 반나절이면 끝나요. 지붕과 벽을 덮은 가죽을 걷어내면 나무뼈대가 드러나잖아요. 나는 따뜻해진 공기와 햇살이 겨우내 춥고 어둡던 게르에 가득 들어오는 게 좋아요. 나무를 걷어내고 살림살이를 옮기고 나면 동그란 바닥이 드러나고 덮고 있던 가죽을 들추면 흙냄새가 올라와요. 나는 그 축축하고 부드러운 흙에서 나는 냄새도 좋아요. 하지만 아빠 없이 하는 이사는 무척이나 힘들고 쓸쓸했어요. 이곳에 새로 게르의 기둥을 박을 때 삼촌과 친구들은 아빠이야기를 했어요. 아빠라면 단숨에 나무 기둥을 박았을 거라고 말이에요. 삼촌과 친구들이 뼈대에 가죽을 씌우고 문을 내는 동안 엄마와 나는 살림살이를 정리하고 할머니는 불을 지펴 차를 끓였어요. 우리는 난로 옆에 둘러앉아 만두를 먹으며 차를 마셨어요. 빙 둘러앉자 아빠의 빈 자리가 더 분명히 드러났어요. 아빠는 항상 난로 위의 주전자에 차가 끓으면 우리에게 차를 따라주셨잖아요. 아빠, 동생의 말처럼 정말 오늘은 엄마가 돌아올까요? 엄마도 오늘이 내가 학교에 처음 가는 날이라는 걸 알고 있거든요. 아빠, 어쩌면 엄마는 하와르를 찾으러 너무 멀리 가버린 건 아닐까요? 학교는 생각보다 작았어요. 모두 열다섯 명이 입학했는데 한 반이 되었어요. 전부 멀리서 왔기 때문에 서로 아는 얼굴은 거의 없었어요. 그런데 한명은 조금 낯이 익었어요. 아빠도 생각나세요? 아빠가 떠나기 전이에요. 게르를 지을 곳을 따라 이동 중인 가족이 있었잖아요. 그때 우리 게르에서 하룻밤 묶고 떠난 가족이 말이에요. 양 서른 마리와 말 다섯 마리도 우리 가축 울타리에서 보냈고요. 그때 아빠랑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던 콧수염 난 아저씨의 딸이 그 아이였어요. 알고 보니 그 아저씨도 그때 게르를 지어놓고 한국으로 가셨대요. 아, 어쩌면 아빠는 그때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삼촌은 수업시간 내내 문밖에서 서성이며 교실을 지켜봤어요. 그러더니 쉬는 시간에 들어와서 공책 위에 사탕을 놓았어요. 그리고 내 귀에 대고 말했어요. 엄마를 찾으러 간다고. 삼촌은 자꾸 뒤돌아보며 내게 손을 흔들었지만 나는 삼촌이 빨리 교실을 나가 말을 타고 엄마를 찾으러 가길 바랐어요. 삼촌은 교실 밖에서 소리 없이 입만 뻥긋거리며 말했어요. 엄마를 꼭 찾아오겠다고. 나는 삼촌에게 다시 손을 흔들었고요. 그 아이는 칠판에 쓰여진 글씨를 열심히 받아쓰고 있었어요. 나는 사탕 두 개를 슬쩍 그 아이 책상에 놓았어요. 우리는 쉬는 시간에 사탕을 하나씩 입에 넣고 약속이나 한 듯 교실에 크게 붙어 있는 세계지도 속에서 한국을 찾아봤어요. 그 아이는 한국의 수도가 서울이라는 것까지도 알고 있었어요. 나는 안산이 어디인지 찾아보려고 했지만 지도에는 나오지 않았어요. 지도에 보이지 않으니까 갑자기 아빠가 어디쯤에 있는지 더 궁금해졌어요. 그리고 조금은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어요. 안산이 지도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아빠가 한국이라는 나라의 지도 안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거든요. 그 아이가 이 지도는 세계 지도라 나오지 않는 거라고 해서 마음이 놓였어요. 아빠 다음에 한국이 자세하게 나온 지도를 보내주세요. 그곳에서 아빠가 계시는 곳을 찾아보게요. 그 아이와 나는 학교 버스를 타고 집으로 왔어요. 육인승 버스가 터덜거리며 달리는 바람에 그 아이와 나는 멀미가 났어요. 사실 버스는 처음 타보는 거잖아요. ‘나쁜 놈.’ 내가 중얼거리자 그 아이가 누굴 말하는 거냐고 물었어요. 나는 그냥 친구라고 말했어요. 아빠, 하와르가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한편으로는 미웠거든요. 보름 전까지만 해도 나는 하와르를 타고 학교에 갈 생각이었어요. 아빠도 생각을 해보세요. 이렇게 답답하고 덜컹거리는 버스가 아니라 새로 산 책가방을 메고 하와르를 타고 가는 내 모습이 더 멋지지 않겠어요? 그런데 하루아침에 사라지다니. 더구나 하와르를 찾으러 간 엄마까지 보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못하고 있잖아요. 멀미 때문에 얼굴이 하얘진 그 애를 남겨두고 내가 먼저 내렸어요. 그 애는 더 멀리 가야했기 때문이에요. 아빠, 나는 정말 하와르가 미웠지만 그 애의 창백한 얼굴을 보는 순간 마음을 고쳐먹었어요. 하와르가 돌아오면 하와르를 타고 그 애를 내 뒤에 태운 다음 학교에 가겠다고 말이에요. 아마 매일 학교에서 그 애와 나는 세계지도 앞에서 한국을 찾아볼 것 같아요. 아빠 그곳도 여기만큼 별이 많은 곳인가요? 여름밤이면 양떼들을 우리에 몰아넣고 저녁을 먹고 나서 아빠와 벌판에 누워 별을 보던 때가 생각나요. 그때 아빠는 하늘에 촘촘히 박힌 별이 반짝이면 종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고 했잖아요. 언젠가 편지에 아빠는 하늘의 별이 보고 싶다고 하셨지요. 한국, 안산에는 별이 없나요. 똑같은 지구 위의 똑같은 하늘인데 거기는 별이 없고 여기에만 있는 건가요. 오늘따라 별이 유난히 반짝거려요. 엄마를 찾으러 떠난 삼촌도 돌아오지 않아요. 아무 염려마라며 할머니가 내 등을 토닥였어요. 그러나 밤새 뒤척이는 건 할머니도 마찬가지에요. 나는 다시 화가 났어요. 하와르를 찾지 못했는데도 돌아오지 않는 엄마가 바보라고 말했어요. 할머니는 내게 진심이냐고 물었어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어요. 아빠도 아시잖아요. 하와르가 내게 특별한 말이라는 것을. 그런데 뜻밖에도 할머니는 하와르가 엄마에 특별한 말이기 때문이라고 했어요. 하와르가 엄마에게도 특별한 말이라니. 나는 궁금해져서 할머니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어요. 엄마는 말을 타고 초원을 달리며 양떼를 몰았대요. 그 모습에 반한 아빠가 어느 봄날 어린 말을 데리고 엄마 앞에 나타났다고요. 아빠는 아무 말도 못하고 어린 말을 엄마에게 건네면서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대요. 말을 타고 초원을 천방지축 뛰어다니던 엄마도 어느새 얌전한 아가씨처럼 고개를 숙였대요. 그때부터 그 어린 말을 봄날에 왔다고 하와르라고 불렀다면서. 하와르와 함께 청혼을 받은 엄마는 아빠와 아무도 없는 초원으로 가서 깃대를 꽂았다고 할머니가 말했어요. 나는 왜 깃대를 꽂았냐고 할머니에게 물어봤어요. 할머니는 벌판에 깃대를 꽂는 이유를 ‘이곳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소’하고 알리는 거라고 했어요.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어요. 어차피 초원에는 말과 양들뿐일 텐데 누구에게 알린다는 건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할머니는 웃으면서 말했어요. 그건 하늘에게일 수도 있고 땅이나 바람에게일 수도 있다고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려니까 괜히 웃음이 나왔어요.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엄마랑 단둘이 있을 때 아빠의 모습이 그려져서요. 아빠, 그때 씩씩한 엄마 옆에서 얼마나 부끄러우셨어요? 아빠는 아마 애꿎은 풀만 뜯었을지도 몰라요. 정말 그랬을 거예요. 내가 부끄러움을 잘 타는 것도 다 아빠 때문이잖아요. 아빠는 지금도 여전히 수줍음이 많다는 걸 알아요. 지난번 편지에도 쓰셨잖아요. 그곳, 한국 사람들도 몽골 사람들과 생긴 게 똑같아서 말을 안 하면 잘 모른다고요. 혹시 아빠 한국에서 입을 꼭 다물고 다니시는 거 아니에요? 말이 안 통해서이기도 하겠지만 아빠의 수줍음 때문이라는 거 알아요. 그럴 때 그 아이의 아빠를 만났으면 좋겠어요. 그날 아빠는 콧수염 아저씨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잖아요. 아빠도 친구가 생기면 낯선 곳에서 덜 외로울 텐데요. 한국은 몽골처럼 말을 타고 몇 시간을 달려가야 이웃을 만날 수 있는 그런 곳인가요? 내일은 그 아이의 아빠가 계신 곳이 한국 어딘지 물어봐야겠어요. 선생님께서 칠판에 글씨를 썼어요. 오르ㄷ(남쪽), 가자르(땅), 쵸ㄹ(사막), 에쥐(어머니), 하와르(봄)……. 선생님이 소리 내서 읽고 아이들이 따라 읽었어요. 나는 하와르까지 따라 읽다가 그만 두었어요. 아빠, 오늘도 엄마와 하와르는 돌아오지 않을까요? 일교시가 끝났을 때 교실 문을 열고 그 아이가 들어왔어요. 두 눈이 자라눈처럼 퉁퉁 부어 있었어요. 나는 일교시에 쓴 노트를 보여주었어요. 그 아이는 아무 말 없이 글씨를 옮겨 적었어요. 그 아이를 보자마자 그 아이의 아빠가 계신 곳을 물어보려고 했는데 망설여졌어요. 그 아이가 계속 코를 훌쩍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수업이 다 끝나자 선생님이 그 아이를 불렀어요. 그 아이는 앞으로 나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섰어요. 책가방을 싸던 아이들이 그 아이를 바라봤어요. 선생님은 만나자마자 이별이라면서 내년에는 꼭 다시 학교로 오라고 했어요. 그 아이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어요. 버스에 타서도 그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하는 수 없이 내가 말을 건넸어요. 왜 학교에 못 나오느냐고. 그 아이는 피식 웃었어요.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못했어요. 결국 나는 아까부터 하고 싶은 말을 했어요. 너희 아빠가 계신 곳이 혹시 한국의 안산인가 하는 곳이 아니냐고. 그 아이는 고개를 가로로 저었어요. 그 아이가 자기 아빠는 곧 몽골로 돌아온다고 했어요. 아빠가 한국에서 일하다가 손을 다쳐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됐고 그래서 자기는 이제 학교를 더 다닐 수 없다고 말했어요. 그 아이가 내게 낡은 책을 꺼내 주었어요. 책에는 낯선 글씨들이 적혀 있었어요. 한국어 책이라고 말하는 그 아이의 눈동자가 글썽였어요. 자기는 한국어를 배워서 앞으로 한국어와 몽골어를 통역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말했어요. 나는 통역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지만 그 아이가 그런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는 게 놀라웠어요. 책에는 까만 글씨로 ‘어머니’와 ‘아버지’라고 써 있고 연필로 작게 ‘에쥐’, ‘아아바’가 써 있었어요. 그 아이는 벌써 글자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나 봐요. 나는 처음 보는 한국 글씨가 조금 신기했어요. 하지만 나는 차마 책을 받을 수 없었어요. 잘 모르겠지만 그 책은 그 아이의 꿈이 들어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내가 날름 받는 것은 잘못된 일인 것 같았어요. 나는 그 아이에게 방학이 되면 우리 게르로 오라고 했어요. 내가 학교에서 적은 공책들을 모아서 주겠다고요. 그리고 그동안 한글을 많이 배워서 내게 가르쳐 달라고 했어요. 우리는 손가락을 걸고 약속했어요. 나는 그 아이를 남겨놓고 차에서 내렸어요. 울어서 눈이 퉁퉁 부은 데다 멀미 때문에 얼굴이 창백해진 아이를 태운 차는 벌판을 달려갔어요. 마중 나온 할머니가 나를 안아주었어요. 할머니 품에 안기니까 갑자기 피곤함이 밀려왔어요. 그 아이의 아빠가 다쳤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아빠 생각에 마음이 콩당콩당거렸거든요. 갑자기 사진 속에서 아빠가 들고 있던 전기 톱날이 내 머릿속에서 ‘위~잉’하고 돌아가는 것 같았어요. 내가 제일 좋아하는 할머니가 따끈하게 찐 보츠(만두)도 오늘따라 맛이 없었어요. 할머니는 내가 만두를 잘 먹지 않자 어디 아프냐고 걱정하셨어요. 나는 할머니에게 그 아이의 아빠 이야기를 하지 못했어요. 아빠 날이 밝아 오고 있어요. 삼촌이 엄마를 찾아 떠난 지도 사흘이 지나고 있어요. 동생과 할머니는 새벽에야 겨우 잠이 든 것 같아요. 나는 아빠가 항상 앉았던 난로 옆에 앉아 있어요. 그때였어요. 히~리링, 히링. 아빠,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가 났어요. 어느새 일어났는지 할머니와 나는 동시에 문을 열어젖혔어요. 멀리 밝아 오는 하늘 아래 말 세 마리가 다가오고 있어요. 올가야. 아빠, 삼촌이었어요. 나는 달려갔어요. 하와르가 내 앞에 우뚝 섰어요. 엄마는 두 팔로 하와르의 목을 껴안듯 감고 잠이 들어 있었어요. 하와르가 지친 엄마를 태운 채 이곳으로 돌아오고 있었다고 삼촌이 말했어요. 삼촌과 할머니가 엄마를 부축해서 침대에 눕혔어요. 나는 얼른 따뜻한 차를 가져와 엄마의 차가운 손에 댔어요. 엄마가 살며시 눈을 뜨며 웃었어요. 머리맡에 걸린 새 옷을 보곤 눈을 감고 다시 깊은 잠에 빠졌어요. 아빠, 이제 엄마와 하와르가 멀고 긴 여행에서 돌아왔어요. 할머니가 무릎을 꿇어 땅에 절하고 팔을 펴서 하늘에 감사하고 휘파람을 불어 바람에게 인사를 했어요. 하와르는 지친 걸음으로 우리로 들어갔어요. 나는 당장 하와르의 등에 올라타고 싶었지만 당분간은 참아야 할 것 같아요. 할머니가 그러시는데 하와르가 새끼를 가졌대요. 원래 야생마였기 때문에 짝을 찾아 벌판으로 간 거 같대요. 아빠를 찾아 한국으로 달려가자고 한 나 때문에 떠났던 건 분명 아니었어요. 아빠, 올가는 아빠를 위해서 항상 따뜻한 차를 끓이고 있을 거예요. <끝> |
<2009 신춘문예> 최종심 작품들 개성 넘쳐, 당선작 ‘풍부한 감성’ 점수 |
동화 심사평 |
올해의 심사는 유난히 즐거웠고, 유난히 고민스러웠다. 저마다 아주 다른 개성을 보여 주는 최종 후보작 네 편이 모두 당선작으로 손색없었기 때문이다. ‘은실이’는 안정적인 문장과 구성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매끄러울 정도로 부드러운 글로 차근차근 풀어가는 이야기는 흠잡을 데 없는 짜임새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소재와 구성 방식이 진부하다는 점, 캐릭터의 설득력이 약하다는 점이 아쉬움이었다. 그에 비해 ‘우리들의 얼음 땡’은 흔한 소재를 참신한 방식으로 짜낸 플롯이 돋보였다. 왕따 당하는 아이, 거기에 앞장서는 아이, 바로잡으려 하는 아이, 그 셋의 시각을 따로 펼쳐 보이는 이야기는 홍상수의 영화를 보는 듯했다. 왕따에 관한 글에서는 흔히 아이들이 절대적인 피해자나 가해자, 착하거나 나쁜 아이로 그려지지만 이 작가는 정교한 심리묘사를 통해 세 아이의 다층적인 마음 상태를 여러 각도로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50장 단편은 그 모든 것을 담아내기에는 작은 그릇이라 그 노력이 충분히 펼쳐지지 못하고 다급하게 달려가며 끝맺는다. 글감의 규모에 맞는 형식을 선택하기를 권하고 싶다. ‘변기통, 주방을 점령하다’는 읽는 내내 폭소를 터뜨리게 했다. 과감한 소재, 기발한 상상력, 거침없는 말장난이 그야말로 통쾌, 유쾌하다. 우리 동화에 가장 필요한 새 바람이 바로 이런 요소들일 것이다. 그러나 소설과 동화 사이, 장난과 풍자 사이, 환상과 공상 사이에서 아직 제자리를 잡지 못한 채 흔들리는 듯한 작가적 자세가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정하는 것을 망설이게 했다. ‘올가의 편지’는 한국에 일하러 간 아빠를 그리는 몽골 아이의 편지글이다. 외국인 노동자를 다루는 동화가 드문 편은 아니지만 그들을 도움이 필요한 약자로 보는 시각이 대부분인 터에, 이 남다른 설정의 작품은 그 상황에 균형을 잡아줄 다른 시각을 보여주는 사례가 될 수 있을 듯하다. 깔끔하면서 감성 풍부한 문장은, 몽골 유목민들의 삶에 올가가 품는 애정과 자부심을 독자도 함께 느낄 정도의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믿음직하고 다감한 아빠, 강인한 엄마의 캐릭터도 잘 드러나고, 현재에 대한 불안, 미래에 대한 희망도 적절한 상징구조와 함께 설득력 있게 펼쳐지는 이 작품을 올해의 당선작으로 내놓는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최종심에 오른 다른 응모자들에게 격려를 보낸다. 심사위원 김서정·황선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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